이번주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는 경산코발트 광산에서 발굴된 유해에 관한 사건을 다룬듯 합니다.
이와 비슷한 사건은 경남 마산 진전면 여양리 일대에서도 발생을 했었는데요.
경산 코발트 광산 유해발굴 사건과 더불어 경남 마산 진전면 여양리 민간인 학살현장과 그리고 보도연맹과 관련된 내용을 이야기 해 보고자 합니다.
그 동안 이곳이 민간인 학살지 였다고 하는 주민들의 증언이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실체가 드러나지는 않고 있었는데요. 2002년 9월 태풍 '루사'로 인해 산태골 숯막에 매장되어 있는 일부 유해가 드러나면서 마산 뼈동굴은 그 실체가 알려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실제로 민간인 학살 추정 유골이 나오면서 주민들의 증언을 실제로 뒷받침 하게 된 것이죠.
■ 그것이 알고 싶다 뼈동굴 미스터리 핏빛으로 흐르는 계곡의 실체 보도연맹 학살 현장이였나? |
ⓒ 그것이알고싶다 뼈동굴 미스터리
마산 뼈동굴 본격적인 유골 발굴
뼈동굴 미스터리로 알려져 유골과 유품이 발견된 지점은 여양리 산태골에 있는 숯막과 폐광 동굴, 너덜겅지역 등 모두 6곳이였고 마을과는 3, 4㎞ 떨어진 해발 280m의 깊은 산기슭이 였다고 합니다.
ⓒ 그것이알고싶다 뼈동굴 미스터리
유골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작업은 태풍 루사 이후 2년 가까이 지난 2004년 5월 3일 경부터 경남대 박물관 발굴팀(팀장 이상길 사학과 교수)에 의해서 진행되었으며 숯막지역에서는 30명 이상, 너덜겅지역 돌무지 두 지점에서 각 20명, 폐광지역 동굴 안 20명, 3호기에서 27구, 4호기에서 5구의 유골 등 2004년 5월 28일까지 무려 125구 정도의 유골을 수습했다고 밝힙니다.
그리고 최근까지 알려진 바로는 모두 163구의 민간인 유해가 발굴이 되어져 컨테이너 박스에 임시 안치된 채 10년의 세월을 보내다가 2014년 2월 진주 유족회에 의해서 진주로 이전되어 임시 안치된 상태로 아직까지 이 유해들은 DNA검사 등 정확한 진상 규명 등은 되어지지는 않은 상태라고 합니다.
ⓒ 그것이알고싶다 뼈동굴 미스터리
당시 진주유족회는 진주시에 유해를 안치할 장소를 요구했지만 거부당했고, 진주시 명석면 용산고개 사유지를 빌려 임대료를 주고 컨테이너 2개에다 임시 안치하였고 노제까지는 지냈다고 하더군요.
뼈동굴에서 발굴된 유해들을 위한 노제현장
마산 뼈동굴 발굴된 유해가 민간인 학살이라 추정하는 근거는?
발굴된 건 유해만이 아니였다!
ⓒ 그것이알고싶다 뼈동굴 미스터리
당시 발굴현장에서는 유해 뿐만 아니라 M1 탄피 16개와 클립, M1탄두 1개, MG50 탄피 1개, 허리띠 30여개, 반지, 단추, 고무줄, 신발 등 유품들도 다수 수거됐었고 M1탄피와 탄두는 당시 정규 군인들이 쓰던 총탄이었던 점으로 미뤄 군인에 의해 학살된 것으로 추정을 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 그것이알고싶다 뼈동굴 미스터리
또한 MG50은 대공용으로 탱크에 부착됐던 중화기 탄피이기에 당시 민간인 학살에 잔혹하게도 중화기가 동원됐던 것으로 추정을 할 수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 이미지 출처 : 오마이뉴스, 뼈동굴 유해현장에서 발굴된 탄피 등 유품
마산 뼈동굴, 민간인 학살은 유해발굴장소에서 이루어 지지 않았다?
학살이 유해발굴장소인 뼈동굴에서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추정을 하는 것은 유해 발굴 현장에서 발견된 탄피 개수가 사망자에 비해 적고 유골들이 비교적 나란히 놓여있었던 점으로 보아 뼈동굴로부터 떨어진 곳에서 학살된 뒤 이 곳으로 옮겨져 매장됐고 발견된 탄피의 경우에는 일부 죽지 않은 사람들을 확인 사살하는데 이용되었을 것이라고 추정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즉 끔직하게도 근접사격을 통해 확인 사살을 했다는 것이죠.
마산 뼈동굴, 학살된 사람들은 과연 누구인가?
이곳에서 학살당한 사람들은 인근 진주지역에서 온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국민보도연맹원이거나 진주교도소 수감자들로 추정을 하고 있으나 이들이 언제, 누구에 의해 학살당했는지는 아직 정확히 확인되지 않고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는 상태 입니다.
ⓒ 그것이알고싶다 뼈동굴 미스터리
참고로 국민보도연맹은 1949년도에 결성이 되어 좌익사상자들을 보호하고 올바른 길로 인도 한다는 뜻으로 결성을 하였고 국민보도연맹에는 남로당원이었다 전향한 사람들이 의무적으로 가입하게 되어 있었으며, 활동 강령은 대한민국 정부 절대 지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 절대 반대, 공산주의 사상을 배격 등이었고 합니다.
보도연맹 사건
그러나 이 명단에 들어갔던 사람들은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인민군 가담이나, 기타 부역행위를 우려하여 전국에서 군과 경찰에 의해서 이들을 조직적으로 학살하는, 보도연맹 사건이 발생을 하였고 이 뼈동굴에서 나타난 유해들도 이때의 사건으로 인해서 학살이 된 민간인으로 추정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당시 학살은 국군과 서북청년회 등의 극우 단체에 의해서 자행이 되었으며 도시 인근의 야산이나 바다 혹은 폐광 등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자행이 되었으며 학살을 하는 방법은 주로 총살형 이였다고 하더군요.
ⓒ 그것이알고싶다 뼈동굴 미스터리
공식적으로 확인된 4934명과 10만 명에서 최대 20만 명으로 추산되는 민간인을 살해했다고 추정되는 대학살 사건이 바로 보도연맹 사건이니 이토록 많은 유해가 발굴이 되었다고 하면 보도연맹 사건과 연관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 가장 유력할 듯 합니다.
출처 : 위키백과, 한국전쟁 당시 1800명의 보도연맹원, 정치범이 학살된 대전형무소
그것이 알고싶다 경산 코발트광산 학살사건
그것이 알고 싶다 뼈동굴 미스터리에서는 경상코발트 광산 학살사건을 어떤 내용으로 접근을 할 지 모르겠으나 일각에서는 이 뼈동굴을 전국 10대 공포체험 명소 중 하나로 꼽는다고 하니 참담할 따름 입니다.
정말로 잔혹한 역사적 사실이 이곳에 은폐가 되어 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죠.
※ 경산 코발트광산 학살사건(자료출처 : 위키백과)
사건의 피해자는 크게 대구형무소 및 부산형무소 수감자와 보도연맹원의 두 부류로 나뉜다. 1960년에 이루어진 대한민국 제4대 국회 양민학살 특위의 조사에 따르면 대구형무소 재소자 1402명이 7월에 학살되었다고 한다. 또, 대구형무소에서 부산형무소로 이감된 것으로 기록된 1404명 중 1172명의 명단이 부산형무소 재소자 명단에 나오지 않아 이 사람들도 학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1950년 당시, 경산, 청도, 영천, 창녕, 밀양 등의 지역의 보도연맹원들은 한국전쟁 직후 검속되었고, 이후 학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피해자 유족들에 따르면 대부분 좌익 사상이나 반공 활동과는 무관한 단순부역자나 농민이었다. 정부 추산 2,000여 명, 유가족 추산 3,500여 명이 학살당했다. |
ⓒ 그것이알고싶다 뼈동굴 미스터리
수많은 사람들의 유해가 발굴된 그것이알고싶다에서 방송이 된 경산코발트 광산 학살사건 뼈동굴 미스터리...
훗날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 위해서라도 언젠가는 이 미스터리한 일의 진실이 꼭 밝혀 지길 바랄 뿐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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